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알 아문센 (문단 편집) === 북극을 날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mundsen_in_fur_skins.jpg|width=100%]]}}}|| || 1923년 경의 51세의 아문센[* 1870년대생이라는 점과, 혹독한 극지방 탐험으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겨우 50이 막 지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노안]]이다. 극지방의 상대적으로 희박한 [[오존층]]을 뚫고 내려온 뒤 얼음에 쉴새없이 반사된 강한 [[자외선]] 탓도 있을 것이다.][* [[이누이트]]들과 친하게 지내서 그런지 이누이트 [[추장]]을 닮았다. 후술하겠지만, 아문센은 이누이트의 혈통이라는 설도 있다.] || 1923년 5월, 알래스카 웨인라이트에서 한 젊은 자본가와 함께 시도했던 북극 비행에 실패하였다. 당시 비행기는 워낙 비싸서 도저히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세 대를 준비할 예정이었는데, 한 대당 8만 5천달러라는 말에 기겁했다고 한다. 지금의 값어치보다 더 엄청난 거액이었기 때문이다.] 1924년 여름에 아문센은 호콘 H. 함메르와 공동으로 사업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파산하고 만다. 시애틀에 사는 호콘 H. 함메르라는 덴마크인은 아문센의 전권을 위임받지 않은 상태에서, 아문센 몰래 아문센 이름으로 방대한 규모의 채무 계약을 하였고 이 때문에 파산을 당하고 만다. 언론에서는 웨인라이트에서 한 비행 시도를 비판하였고, 빚 때문에 20년 넘게 그에게 책자를 조달해주었던 형 레온과도 갈라서고 만다. 1924년 가을, 아문센은 다행히도 꼭 그를 후원하고 싶다고 찾아온 미국인 링컨 엘즈워스와 만나서 그의 후원을 받게 된다. 1925년 5월 21일, 아문센과 링컨 엘즈워스, 팀원들은 두 대의 [[도르니에]] [[https://en.wikipedia.org/wiki/Dornier_Do_J_Wal|Do J]] 비행정(기체번호: N24, N25)로 북극을 향해 비행했다. 그러나 두 기체 모두 북위 87도 44분에 비상 착륙하였고,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지만 N24 기체는 착륙 과정에서 손상을 입어 현장에 유기되었고 남은 여섯 명의 남자들은 3주 넘게 500톤의 얼음과 눈을 치워서 임시 활주로를 만든 다음 길이 17미터가 넘고 중량이 3.3톤에 달하는 N25 기체를 180도 돌려 이륙 준비를 마친 다음 7월 5일에야 복귀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 본국에서는 한달 넘게 탐험대의 소식이 끊기면서 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전원 살아 돌아왔으니 축제 분위기였다고. 1926년 봄, 아문센은 미국을 횡단하면서 N24와 N25를 이용한 탐험 시도에 대해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이때, 옛날 벨지카 호에서 아문센과 함께 탐험했던 프레드릭 앨버트 쿡의 운명은 참으로 비참하게 되어 있었는데, 경영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형을 받아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문센은 캔자스 시티를 지나다가 쿡이 가까운 포트 리븐워스 국립교도소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자, 옛 동료 쿡을 위해서 시간을 내서 교도소를 방문하여 그를 면회하였다. 아문센은 그의 통찰력 덕분에 벨지카 호에서 목숨을 건졌다고 여겨서 지금까지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아문센은 미국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초대 강연이 모두 취소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